
임지연은 2010년대 초반 데뷔한 이후, 차근차근 필모그래피를 쌓아온 배우다. 초반에는 파격적인 역할 선택으로 주목받았지만, 점점 장르의 폭을 넓히며 연기력으로 인정받는 배우로 성장했다. 특히 최근 3~4년 사이 보여준 연기는 그녀가 단순히 '이미지'로 승부하는 배우가 아닌, 진정한 연기자임을 입증해 주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임지연이 연기 인생에서 보여준 세 가지 대표 캐릭터 — <더 글로리>의 박연진, <마당이 있는 집>의 추상은, <인간중독>의 종가흔 — 을 중심으로, 그녀의 연기 변화를 비교 분석하고자 한다. 각각의 배역은 서로 다른 장르,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어 배우 임지연의 스펙트럼을 입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기준점이 된다.
박연진 (더 글로리) – 악역 연기의 신기원을 쓰다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에서 임지연이 연기한 ‘박연진’은 악역의 교과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존 한국 드라마 속 악역은 보통 극적인 감정선이나 과장된 행동으로 설명되기 쉬운 캐릭터였다. 그러나 박연진은 훨씬 현실적이고, 그 현실성이 오히려 더욱 무서운 인물이었다. 겉으로는 성공한 아나운서이자 기상캐스터, 학부모 모임에서 인기 있는 엄마이자 아내였지만, 속으로는 끔찍한 과거를 감춘 가해자였던 것이다.
임지연은 이 캐릭터를 단순한 악인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그녀는 박연진을 하나의 현실적인 인간으로 구현했다. 뻔뻔한 태도 속에 깃든 공포, 자신이 처한 위기에 대한 본능적인 방어, 그리고 점점 무너져가는 자아까지, 한 치의 오차 없이 감정을 쌓아 올렸다. 특히 시즌2에서 박연진이 서서히 몰락하는 과정은, 임지연의 연기력 정점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표정 하나, 눈빛 하나로 감정을 표현하며, 단순한 대사 이상의 감정 폭발을 보여줬다.
“사람들이 나를 미워했으면 좋겠다”는 그녀의 인터뷰처럼, 임지연은 연기자로서 캐릭터에 완전히 몰입했고, 그 결과로 박연진이라는 캐릭터는 드라마 역사상 가장 강렬한 악역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이 작품으로 임지연은 백상예술대상 여자 조연상을 포함해 다수의 시상식에서 수상의 영예를 안았고, 대중과 업계 모두에게 '임지연의 재발견'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추상은 (마당이 있는 집) – 내면 연기의 깊이를 보여주다
ENA 드라마 <마당이 있는 집>은 가정이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비밀을 다룬 스릴러로, 임지연은 이 작품에서 또 하나의 인생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추상은’은 임산부이자 가정폭력의 피해자로, 겉보기에는 조용하고 무기력하지만, 그 속에는 절망과 공포, 그리고 아주 작지만 단단한 생존 의지가 존재하는 인물이다. 이 역할은 ‘말보다 침묵’, ‘폭발보다 억눌림’이 중요한 캐릭터였다.
임지연은 추상은을 연기하며, 대사보다 표정과 행동에 집중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퀭한 눈빛, 쫙 마른 체형과 축 처진 어깨는 캐릭터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외형적인 요소보다 더 중요한 건 바로 그녀의 ‘먹는 연기’였다. 남편의 죽음 이후 중국집에서 짜장면과 탕수육, 군만두를 먹는 장면은 단순한 식사 장면이 아니었다. 해방과 공허, 울분과 슬픔이 뒤섞인 복합 감정을 오직 표정과 먹는 행동만으로 표현해 낸 그 장면은, 2023년을 대표하는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또한 그녀는 피해자로만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단순히 불쌍한 여성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견디며 살아남으려는 인간의 본능을 표현했다. 덕분에 추상은은 시청자들에게 더 깊은 울림을 줬고, 이 작품 이후 임지연은 '먹방연기의 장인', '현실 연기의 고수'라는 새로운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는 이 작품으로 제60회 백상예술대상 최우수 여자연기상 후보에 오르며 다시 한번 자신의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종가흔 (인간중독) – 화려했던 데뷔, 대담한 선택
임지연의 상업영화 데뷔작 <인간중독>은 2014년 개봉 당시 파격적인 설정과 수위 높은 장면들로 화제를 모았다. 임지연은 이 영화에서 군인의 아내이자 화교 출신의 여성 ‘종가흔’ 역을 맡았다. 이 역할은 단순한 멜로의 여주인공이 아니라, 남성 중심의 권위적인 사회 속에서 억눌린 욕망을 가진 복잡한 인물이었다.
신인 배우로서 쉽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임지연은 대담하게 이 배역을 선택했고, 결과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그녀는 ‘신비롭고 요염한 분위기’로 많은 관객의 주목을 받았고, 실제로 그 신비로움은 단순한 외모에서 오는 것이 아닌, 말투, 눈빛, 걸음걸이 하나하나에서 캐릭터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종가흔은 대사량이 많은 캐릭터는 아니었다. 하지만 임지연은 말이 아닌 감정선으로, 금기를 넘나드는 관계의 긴장감을 유지했다. 상대 배우와의 케미도 호평을 받았으며, 무엇보다 신인답지 않은 집중력과 몰입도가 인상 깊었다. 이 작품으로 그녀는 대종상, 부일영화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 신인상을 수상하며 단숨에 주목받는 신인 여배우로 부상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인간중독>의 종가흔은 임지연의 가능성을 세상에 처음으로 알린 캐릭터였다. 이후 그녀가 얼마나 다양한 역할로 성장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시발점이었고, 단 한 작품으로도 관객에게 잊히지 않는 인상을 남겼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박연진, 추상은, 종가흔은 서로 다른 장르와 성격을 지닌 캐릭터이지만, 이 모든 역할을 통해 임지연은 배우로서의 진정성과 내면의 깊이를 증명해왔다. 그 누구도 쉽게 해내기 힘든 악역의 설득력, 피해자의 울림, 멜로의 신비로움까지 모두 자신의 것으로 만든 임지연. 앞으로 그녀가 또 어떤 도전을 보여줄지, 어떤 캐릭터를 만들어낼지, 많은 이들이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분명한 건, 그녀는 이제 단순한 ‘예쁜 배우’가 아니라, 대한민국 드라마·영화계를 대표하는 ‘연기파 배우’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는 사실이다.